메타버스는 선사시대에도 존재했다.
나는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을 좋아한다. 모든 것이 과거의 변조이자 새로운 조합이라고 느낀다. 어디선가 보았던, 들었던, 느꼈던 기시감이 도처에 존재한다.
최근에 메타버스가 열풍을 넘어 광풍 수준이다. 어휘가 주는 세련된 느낌 때문인지 뭔가 전에 없었던 새로운 기술인 것처럼 다가온다. IoT, 사물인터넷의 다른 이름이 ‘유비쿼터스’ 였듯이 메타버스는 이전에도 존재했던 세상이다.
2000년대 싸이월드, 세컨드라이프(Second Life), 트위니티(Twinity)는 말할 것도 없이 온갖 ‘부케’가 생명력을 갖고 활동하는 모든 SNS가 사실 메타버스다. 가상, 추상을 의미하는 ‘메타 meta’와 현실세계를 뜻하는 ‘버스 universe’가 합쳐진 것이 ‘메타버스 Metaverse’라고 한다면 영화, 연극 안의 세계도 ‘메타버스’다. 우리는 그 안에서 새로운 나를 만난다. 비록 내가 캐릭터를 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나 ‘메타버스’다.
선사시대, 모닥불을 피워 놓은 동굴 안은 고대인들에게 그들 만의 메타버스였을 것이다. 벽에 그려진 들소, 사자들이 일렁이듯 살아 숨 쉬고 집단적인 제의로 반 환각 상태가 되었을 테니까…
우리 일상도 메타버스

사실 우리는 3D헤드셋을 쓰지 않아도 이미 가상세계에서 살고 있다. 일터로 나가면 게으르고 이기적인 나를 버리고 성실하고 착한 직원이 되어 일상을 버틴다. 처가에서는 듬직한 사위로, 동창회에서는 잘 살고 있는 친구로, 집에서는 착한 남편, 믿음직한 아빠로 살아간다.
환경에 따라 가면(페르소나)을 바꿔가면 살아가는 현실세계가 진정 현실세계인지 물음표가 그려진다. 혹시 파란 약을 먹고 공상 속에서 행복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장자의 이야기처럼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분간이 안 갈 지경이다.
영화 ‘프리가이’는 ‘트루먼쇼’의 오마주다.

프리가이를 보면서 계속 짐 캐리가 떠올랐다. 너무나 유명한 영화 ‘트루먼쇼’의 그 짐 캐리 말이다. 짐 캐리가 다소 어벙한 얼굴로 화면을 향해 ‘굿모닝’ 하는 모습이 선하다.
프리시티의 ‘가이(라이언 레이놀즈)’ 역시 익살스러운 얼굴로 금붕어에게 인사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트루먼이 꽉 짜인 드라마 속에서 어제와 다를 것 없는 일상을 이어가는 것처럼 ‘가이’도 매일 같은 커피를 마시고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
모든 것이 ‘쇼 show’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 첫사랑, ‘실비아’, 그녀를 찾아 반복된 삶을 벗어가게 되는 트루먼. 우연히 만난 ‘밀리'(조디 코머)를 찾아 정해진 일상에서 벗어나 일탈을 꿈꾸는 ‘가이’가 또 오버랩이 된다.
새로운 세계에 눈이 뜬 ‘가이’가 친구 ‘버디’에게 묻는다.
“뭔가가 더 있을 거란 생각해본 적 있어? 매일같이 우리가 하는 일 말야 총 맞고, 치이고, 인질로 잡히는 거”
그러자 버디는 말한다.
“단 한 번도 없는 걸”
꿈에서 깨어난 장자와, 동굴 속에서 그림자가 아닌 빛을 본 철학자처럼 버디는 평범한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좋은 사람이 되지는 않을 거예요 난 최고의 사람이 될래요”
결국 두려움을 극복하고 바다를 건너 모든 것이 ‘쇼’라는 사실을 확인한 ‘트루먼’처럼 가이 또한 바다를 건너 그가 살아가는 세상이 가상 게임 일 뿐이라는 현실에 직면한다. 순간, 가이는 낙담한다.
“버디, 우리가 진짜가 아니라면 이 모든 게 다 쓸데없다는 얘기 아니야?”
그러자 버디는 이야기한다.
“난 여기 앉아서 내 절친이 힘든 시간을 이겨내게 돕고 있어 그게 진짜가 아니면 뭐가 진짜겠어?”
트루먼은 현실세계로 나갔지만 이후 그의 인생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어떤 면에선 그에게는 세트장이 더 편하고 행복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타자’로만 존재했던 그에게 이제 ‘메타인지’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제 그가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능동적으로 살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결국 진짜(real)냐 가짜(not real)냐는 인식의 문제로 귀결된다. 때문에 가이는 이야기한다.
“밀리, 이 세상은 그저 게임인 거 알아요 하지만, 이곳과 이 사람들이 내 전부예요”
트루먼쇼의 연출자 크리스토프(에드 해리스)의 페르소나가 트루먼이었던 것처럼 게임’프리 시티’의 창조자, ‘키즈(조 키어리)’의 페르소나는 ‘가이’다. 가이가 자신이 어떤 존재임을 인식하고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갈 때 오히려 키즈는 닫힌 현실 속에서 살고 있다.
옳지 않은 줄 알지만 게임회사의 폭력적인 CEO 앤트완(타이카 와이티티)에게 복종하고 사랑하는 연인이 곁에 있으매도 고백조차 못한다. ‘가이’라는 페르소나에게 투영된 사랑을 확인한 밀리가 먼저 다가와 키즈에게 안기고서야 키즈는 자신의 리얼월드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메타버스를 넘어 옴니버스로
영화는 현실세계와 게임 세상(메타버스)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현실은 가상세계와 연결되어 있고 가상세계는 현실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인간의 인식이며 메타인지(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를 가진 존재라야 리얼 캐릭터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래서 영화가 전하는 마지막 메시지는 이것이다. 그게 현실세계이든 가상세계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