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농경민이다. 유목민이 아니고…
지식노매드, 디지털노매드…수년 전 서점가에 노매드 열풍이 풀었다. 자유를 상징하는 노매드는 월급 날 만을 기다리는 셀러리맨들의 가슴에 뽐뿌질을 했다. 나 또한 그 중의 한 사람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 맞나? 나 답게 사는 게 뭘까? 노트북 하나 들고 ‘발리’가서 느긋하게 사는 사람도 있다 던데…하지만 현실과 이상의 격차는 너무 커서 아직까지 그 거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인생은 나그네길~
나는 어릴 적부터 뭔가 일이 잘 안 풀릴 때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는 노래가 있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로 갔다가 어디로 가는가?~’ 故최희준 선생의 ‘하숙생’ 이 그것이다. 어린 나이에도 그 노래가 그렇게 마음에 딱 하고 박혔다. 노래는 상당히 철학적이다. 공수래 공수거(空手來空手去), 아무 것도 들고 오지 않은 것처럼 어떤 것도 들고 가지 않는 게 인생이라는 거다. 삶이 퍽퍽할 때 이 가사를 뇌까리면 왠지 마음에 안정이 찾아든다.
노매드는 집 없는 사람들이 아니다.

영화 ‘노매드랜드’는 길 위를 떠도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떠나고 싶어 떠난 사람들이 아닌 떠날 수 밖에 없어 떠난 사람들에 대한…여기 퍽퍽하기만 한 노매드의 삶을 선택한 한 여인이 있다. 그의 이름은 ‘펀’이다. 심리학 연구 중에 이름 따라 인생이 바뀐다는 이론이 있다, ‘데니스(Dennis)’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치과의사(Dentist)가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인데 인생이 꼭 이름처럼 흘러가는 건 아닌가 보다.
그녀에게는 집이 없다. ‘벵가드’라고 불리우는 낡은 밴이 그녀가 가진 전 재산이다. 밴에서 자고 밴에서 먹고 밴을 타고 전국을 돌아다닌다.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과거 제자였던 학생의 어머니가 자기 집에서 같이 지내자고 한다. 그 때 ‘펀’은 말한다. 주택이 없을 뿐이지 집이 없는 것 아니다( I’m not a homeless. I’m just houseless) 라고… *뱅가드(Vanguard) 전위, 선봉대, 선구자.
자격지심으로 던진 빈말이 아니라 사실 그녀에게 있어 벵가드는 차가 아니고 집home이다. 그 안을 꾸미느라고 들인 그녀의 노력을 생각하면 말이다.
아마존이 상징하는 부의 불평등과 인간소외

펀은 과거 ‘엠파이어’ 라는 작은 도시에서 남편과 행복하게 살았다. 하지만 남편이 죽고 그와 살던 도시가 쇠락하자 ‘펀’은 먹고 살기 위해 도시를 떠난다. 정부 보조금 만으로는 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펀은 노매드로 살기 위한 최소한의 생계비를 위해 아마존 물류창고에서 단기로 일한다.
미국은 불평등이 계층과 계급 뿐 아니라 도시 별로도 격차가 크다. 그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아마존이다. 아마존은 영화의 배경이 되는 ‘엠파이어’ 와 같이 제조업이 쇠퇴한 곳에 물류센터를 세운다. 일자리 부족에 시달리는 지방의 소도시는 아마존에 값싼 노동력과 대규모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일자리가 없는 지방 소도시의 노동자들이 아마존 물류창고의 혹독한 노동환경과 턱없이 낮은 저임금에 시달리는 동안 뉴욕, 워싱턴, 샌프란시스코 같은 대도시는 아마존이 제공하는 경제적 혜택을 톡톡히 누린다. ‘마태의 법칙’처럼 없는 사람의 것을 빼앗아 있는 사람에게 몰아주는 구조가 지금의 미국사회다.
여행 중 고장이 난 ‘벵가드’. ‘펀’은 자존심을 구기며 수리비를 위해 동생이 사는 곳으로 간다. 그곳엔 ‘펀’이 사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계다. 어떻게 하면 자본의 논리에 따라 한 몫 잡아 볼까 혈안이 된 사람들 뿐이다. ‘펀’은 그들 앞에서 노매드의 삶도 소중하다며 항변하지만 되례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자연친화, 사람 간의 연대 만이 상실과 고독을 이긴다

빈부격차와 그로 인한 신뢰의 상실. 그에 대한 대안으로 영화는 사람 간의 연대와 자연과의 친화를 주장한다. ‘밥 웰스’의 ‘저렴한 RV생활 공동체’ 속에서 ‘펀’은 자연과 집단공동체와의 연결을 경험한다. 그곳에서 노매드로 살기 위한 원칙과 다양한 생활방식을 익힌다. 필요한 것은 물물교환을 하거나 직접 만들기도 한다. 취미로 악기를 연주하며 밤하늘의 별빛 보기도 해본다. 스페셜레슨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훈련도 받는다.
공동체 모임에서 ‘밥’은 말한다. ‘달러와 시장의 횡포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그 환경 속에서 우리는 열심히 일하다 초원으로 쫓겨나는 말과 같은 신세다. 때문에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돌봐야 한다’ 고…
“난 너무 많은 세월을 기억만 하며 보냈는지도 몰라요”

영화는 ‘떠남’에 대해서도 묵직한 울림을 준다. 우리가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는 가장 주된 원인은 기억 때문이다. 추억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과거의 기억이 우리를 새로운 세상으로 떠나지 못하게 한다.
‘펀’은 ‘밥’에게 자신의 과거를 고백한다. 아니 그녀가 왜 ‘엠파이어’를 떠나지 못했는 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건 죽은 남편 ‘보’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그녀마저 그를 떠난다면 부모도 자식도 없던 ‘보’를 기억할 사람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 때문이었다. 기억되는 것은 남아 있다는 것이고 기억되지 않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은 사람이기에 떠나지 못했다고 한다.
여행을 잘하는 사람은 지나간 것에 대해 미련을 두지 않는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다. 여행 중에 만난 불쾌한 사람, 지저분했던 숙소, 바가지를 옴팡 뒤집어 쓴 음식점에 대한 기억으로 여행 내내 투덜거리는 사람이 있다. 투덜댄다고 상황이 변하는 건 아니다. 투덜대는 순간, 대신 그는 다시 못 볼 아름다운 경치와 친절한 사람, 그리고 특색 있는 지역 음식의 맛을 놓치게 된다.
‘펀’은 마지막 씬에서 남편의 흔적이 남아 있는 ‘엠파이어’로 간다. 그곳은 ‘보’의 기억과 함께 그녀의 삶이 껌처럼 붙어 버린 장소다. 펀은 살던 집과 동네를 한 바퀴 둘러보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새로운 길을 향해 떠난다. 이제야 그녀는 진정한 ‘노매드’가 된다.
“길에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