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린북’이 제시한 여행 가이드북의 미래

흑인의, 흑인에 의한, 흑인을 위한 여행 가이드 북

 

영화 그린북, 네이버 영화
 

흑인의 인권을 다룬 영화 ‘그린북’에는 제목처럼 ‘그린북(The Negro Motorist’s Green Book)’ 이 나온다.

그린북은 흑인 운전자들을 위한 여행 가이드북이다. 20세기 초, 미국의 흑인들은 인종차별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엄혹한 시대, ‘그린북’은 흑인이 이용할 수 있는 식당과 호텔, 주유소 등을 안내한다.

 

영화 그린북(The Negro Motorist Green Book)의 모티브가 된 빅토르 휴고 그린(오른쪽)의 ‘니그로 여행자를 위한 그린북’ 초판. wikipedia
 

 

그린북 1936년 초판 서문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머지않은 미래에 이 가이드북이 필요 없는 날이 올 것이다. 미국의 모든 인종이 동등하게 대우받고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날이 그날일 것이다. 과연 서문의 말처럼 오지 않을 것 같았던 그날이 왔다. 이제 흑인들 만을 위한 여행안내 책자는 없다. 모든 인종이 동등하게 이용할 수 있는 가이드북 만이 존재한다. 책의 발행인이었던 빅터 휴고 그린이 바라던 세상이 온 것이다. 2021년, 코로나 19가 온 세상을 덮쳐버린 이때, 나는 ‘휴고 그린’이 했던 말을 되뇐다.

머지않은 미래에 이(this) 가이드북이 필요 없는 날이 올 것이다

 

그렇다! 가이드북은 사라질 것이다. 흑인이 애용하던 그린북이 사라진 것처럼 우리 모두가 사랑했던 여행안내책자는 멸종될 것이다.

 

 

모든 것이 귀찮은 나를 위한 맞춤 가이드북은?

 

A는 여행을 준비한다. 예전에는 여행지에서 읽을 책도 여러 권 챙기고 했다. 물론 가이드북도 한 권 사고 말이다. 지금은 여행을 계획하기도 귀찮아졌다. 항공기 탑승 시 무게 제한도 있고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낯선 곳을 헤매는 것도 싫다. 그래서 스마트폰만 챙긴다.

 

여행의 필수품 스마트폰 pixabay

 

이제 스마트폰이 모든 것을 대신하는 시대다. CD 플레이어도 무거운 여행책도, 펼치기 불편한 지도도 스마트폰이 대신한다. 지나간 정보가 아닌 실시간 정보, 여행객들의 생생한 후기가 우리를 안내한다. 위치 기반으로 숙소, 관광지, 음식점, 교통편까지 알려주니 정보 전달 측면에 있어서 ‘스마트폰’은 고효율의 첨단이다.

 

그래도 뭔가 찜찜한 여운이 있어 여행 가이드 하나를 집어 든다. 비슷한 포맷의 비슷한 정보로 가득 찬 텍스트들이 넘쳐난다. 내가 원하는 여행지나 내가 하고 싶은 액티비티는 절대 부족하다.

 

모든 인간이 동등하고 평등하지만 같지는 않다. 저마다의 취향이 있고 개개인의 호불호가 있다. 지금의 여행책들은 모든 사람들이 같다고 한다. 모두 다 이런 곳을 보고 싶겠지. 이런 것을 먹고 싶겠지. 이런 것들을 경험하면 아마 좋아하겠지… 한다.

 

내가 가고 싶은 곳, 내가 경험하고 싶은 것들만 정리된 얇은 가이드북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런 가이드북이 없다. 직접 만드는 가이드북도 있다고 하던데 그 시간에 다른 일에 집중하는 게 백 배 나은 선택이다.

 

 

초개인화의 시대, 여행산업은 뱁새가 되려는가?

 

테일러리즘(Taylorism)의 시대, 우리는 작업시간을 분초 단위로 쪼갰다. 포디즘(Fordism)의 시대, 우리는 분업화된 시스템 속에서 톱니처럼 일했다. 획일화된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대는 가고 다양성이 존중받는 시대다. 개개의 인격과 취향이 무엇보다 중요한, 우리는 탈산업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모든 서비스가 자신을 위해 맞춰졌으면 한다. 조선시대 왕처럼 내 취향에 따라 음식도, 이동하는 동선도 일하는 장소도 최적화되었으면 한다. ICT 기반, 모든 비즈니스가 초개인화에 정조준하는 이유다.

 

여행 분야도 마찬가지다.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비건 음식점. 교통약자들을 위한 안전한 관광지. 접촉이 두려운 사람들을 위한 언택트 여행지. 제로 웨이스트 여행자들을 위한 에코투어. 지역민과 상생하는 로컬 여행자를 위한 마을 여행 등등…사람들의 가치관과 취향만큼 여행의 방법도 세분화되고 있다.

 

 

여행 가이드북은 사라질 것인가?

 

아직 많은 사람들이 가이드북을 본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여행 갈 때 꼭 들고 가는 것은 아니다. 글로벌 가이드북 시장도 마찬가지 인가 보다. 대부분의 여행객들이 트립 어드바이저에서 숙박, 레스토랑 및 관광 명소에 대한 리뷰를 확인하고, Google 스트리트뷰를 활용해 여행지에 미리 가본다. 아고다와 같은 OTA(Online Travel Agency)를 통해 항공, 호텔, 렌터카까지 최저가로 검색하고 유튜브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의 체험을 간접 경험한다.

 

론리플래닛 웹사이트 이미지

 

이런 추세에 따라 여행 가이드북 시장의 강자, 론니플래닛도 그들의 사업방향을 전환하고 있다 한다. 론리플래닛은 인트레피드 트래블(Intrepid Travel)사와의 파트너십을 통해 300가지가 넘는 지속 가능한 여행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다. 이를 통해 거리예술, 맥주 투어, 해양탐사 등 다양한 투어상품을 제공한다.

 

결국 상당 부분의 여행 관련 출판사는 사라질 것이다. 강력한 브랜드의 소수 만이 디지털 콘텐츠 프로바이더가 되거나 여행을 기반으로 하는 다른 업태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이다. 가이드북 자체도 고객의 취향에 Fit 하거나 책값을 지불할 만큼의 충분한 혜택과 편리함을 제공할 때라야 고객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순간, 그린북의 발행인 ‘휴고 그린’이 했던 말을 다시금 되풀이해본다.

 

“머지않은 미래에 가이드북이 필요 없는 날이 올 것이다”